천안함재단 이사장 인터뷰, 40년 군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 연결고리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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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이사장, 중앙일보 인터뷰
천안함재단 이사장 인터뷰, 40년 군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 연결고리 되겠다
[중앙일보] 입력 2016.12.06 15:46 수정 2016.12.07 01:34
5일 오후 손정목 천안함 재단 이사장을 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손 제독(예비역 중장)은 해사 32기 출신으로 해군 전력기획참모부 부장, 해군 교육사령관, 해군사관학교 교장, 해군 참모차장 등 군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특히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천안함 사건 지원본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손 신임 이사장은 이날 오전에 이사회 의결을 거쳐 3대 천안함 재단 이사장에 부임했다. 그는 천안함 수습과정과 군 생활의 경험을 털어놨고 앞으로 천안함 재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Q.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사고 수습에는 어떻게 참여했나?
“참모총장 지시로 현장책임을 맡았다”
당시 직책은 해군 전력기획참모장(소장)이었다. 전력발전 관련 세미나 참석 후 귀가해 쉬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연락받고 사고 수습을 시작했다. 첫날은 해군 본부에서 현황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생존사와 실종자 그리고 전사자 현황을 파악했고 가족들 연락처를 확보해 사고소식을 전달했다. 다음날 당시 해군 참모총장(김성찬)이 해군 2함대 사령부로 이동해 사고를 직접 수습하라고 하셨다. 참모차장이 공석이던 상황이라 나에게 역할을 부여했다. 사고 다음날인 3월 27일부터 장례절차가 완료되는 4월 29일까지 현장에서 유족과 함께 있었다.
Q. 2함대 도착 직후 상황은 어떠했나?
“초기 대응은 부족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솔직히 당시 유가족들을 안내하기에 준비가 부족했다. 가족을 잃거나 생사를 알 수 없는 유족들이 2함대로 달려왔다. 민간인이 부대로 들어가는 건 군사시설 보호 때문에 어렵다. 그러나 유족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쉽게 막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들어가려는 가족과 이를 저지하려는 초병들 사이에 마찰도 있었다. 가족들에게 표찰을 만들어 배포해 부대 출입에 어려움이 없도록 조치했다. 더구나 여전히 날씨가 추웠던 3월이었다. 우선 멀리서 찾아온 가족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숙소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예비군 교육대 시설에 숙소를 준비했다. 각 가정별로 2~3명씩 찾아오기 때문에 더 좋은 시설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전체인원이 200명 수준이었다. 주말에는 이보다 더 많았다. 어떤 가족은 주말에 20명 정도 찾아오기도 했다. 숙소 제공 뿐 아니라 가족들을 전담하는 취사병도 배치했다. 심신이 지친 분들에게 보다 좋은 식사라도 제공하고 싶었다.
Q. 사고 수습과정은 어떠했나?
“자원봉사자 덕분에 유족들이 온전한 유해를 만날 수 있었다”
수습된 유해를 2함대 의무실로 모셔와 검안 등 필요절차를 진행했다. 그러나 당장 유해를 안치할 공간 자체가 부족했다. 원칙대로라면 상급 병원으로 이송해야 했다. 그러나 유족과 실종자 가족들은 흩어지지 않고 같이 있겠다고 했다.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결국 모든 유해를 2함대에 임시로 안치해야 했다. 냉동보존이 가능한 장비를 임대해 가족들이 장례 직전까지 언제든지 찾아와 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을지대학교 자원봉사들이 찾아와 손상된 유해를 복원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Q. 장례절차에 어려움은 없었나?
“유족들 협조로 큰 문제없이 진행 할 수 있었다”
유족들의 협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존 가능성이 줄어들던 상황이었다. 46명의 실종자를 모두 찾을 수 없다는 걱정이 들었다. 유족들은 산화 가능성, 유실 가능성 등을 고려해 모두 산화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해 주셨다. 끝내 유해를 찾지 못한 유족도 있었지만 어려운 약속을 지켜줘 장례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해를 찾지 못한 가족들의 고통이 심해졌다. 그럼에도 유해를 찾은 가족들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며 서로가 힘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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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
“유족의 마음 공감할 수 있었다”
전혀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유족들이 협조해 줬다. 유족들이 다소 오해한 경우가 있었지만 관련 시설과 현장을 공개하고 또한 납득할 수 있도록 노력하니 이해해 주셨다. 일부 유족은 억울한 마음을 다소 거칠게 표출하기도 했다. 서운하기도 했지만 유족의 마음 공감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사정이라면 어떠할까 생각해 보았다. 해군으로서 모두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모두 돌아오지 못해 죄송할 뿐이다. 모든 장례절차가 끝났을 때 대부분의 유족들이 오히려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해줬다. 서운한 마음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Q. 천안함 재단 이사장에는 왜 취임했나?
“봉사정신이 요구되는 엄중한 자리, 의무감으로 나섰다”
사실 천안함 사건을 수습했던 시기는 40년 군대생활 중 가장 힘들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괴롭다. 유족들에게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여전하다. 유족들을 다시 마주할 생각을 하면 더욱 힘들었다. 이 때문에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는 것을 망설였다. 무한 책임과 봉사정신으로 일해야 하는 엄중한 자리였기에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재단 임원은 무보수로 봉사하도록 재단 정관에서 규정하고 있다. 임원의 자격조건도 엄격하다. 그러나 해군 참모총장의 부탁도 있었고 모두가 고사하는 상황이라 결국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이사직을 수락했다. 이사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아 이사장으로 선임된 것 같다.
Q. 재단의 목적은? 어떤 이사장이 되려하는가?
“유족 지원한다는 본질, 재단에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재단은 추모사업, 유족지원, 승조원 지원사업 등을 한다. 이사장에 취임한 것도 유족과 해군 또는 다른 기관들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사고를 수습하던 한 달 동안 유족들과 함께 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를 누구보다 잘 듣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그런 이사장이 되어 재단 설립 목적에 충실하도록 노력하겠다.
Q. 전임 집행부 운영에 부적절한 운용이 일부 있었다는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보편적인 관점에서 문제가 없도록 더욱 신중하겠다”
이사장 도서구입 문제, 황금열쇠의 언론사 사장 증정 등 몇 가지 이슈가 있었다. 당시 집행부는 유족도 포함된 이사회 동의를 얻어 사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앞으로 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문제가 없도록 더욱 신중하겠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재단 운용이 되도록 유의할 것이다. 유족협의회와 더 많이 그리고 충실히 대화하겠다. 재단 존재목적에 부합하도록 하겠다.
Q. 재단 여건은 어떠한가? 어려움이 없나?
“보다 많은 국민들의 관심과 후원이 필요하다”
지금도 후원 해주시는 국민이 있다. 천안함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후원해 주시는 5명의 후원자가 있다. 또한 비정기적으로 후원해 주시는 분도 있어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업을 이자 수익으로 운용하다 보니 금리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저금리 상황이 지속된다면 기금운용에 어려움이 곧 생기게 된다. 유족 장학금지원, 심리치료 지원 등 여전히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수익사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기금운용에 한계가 많다. 또한 모든 유족들이 공감하는 사업 집행이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된다. 보다 많은 국민들이 관심 가져주시고 후원에 동참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Q. 천안함 사건은 북한 도발이다. 재발할 가능성은 여전한가?
“북한 도발은 언제든 가능해 대비가 필요하다”
북한 도발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특히 해군은 언제라도 도발이 발생한다는 경각심으로 갖고 있다. 서해와 북방한계선(NLL)을 책임지는 2함대 뿐 아니라 동해 1함대와 남해를 지키는 3대에서 언제 어떻게 도발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도발이 발생한다는 생각으로 평소 대비해야 한다. 취약한 전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예산 부족 때문에 모든 전력을 갖출 수는 없지만 대잠 작전을 위한 항공전력 강화에 집중했다.
Q. 기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유롭게 부탁드린다.
“극복하는 승조원들에게 편견 없는 따뜻한 마음, 격려 부탁드린다”
승조원들 중 27명은 지금도 현역으로 복무중이다. 일부 전역자들과 함께 해군본부 의무처가 주관하는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승조원들은 사고 이후 심리적 충격을 극복하고자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아무런 문제없이 생활하는 승조원도 많다. 일부는 정신과 진료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라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병원 찾아가기가 어렵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따뜻한 마음으로 승조원들의 적응을 격려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박용한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park.yonghan@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천안함재단 이사장 인터뷰] 40년 군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 연결고리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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